신입사원 시절, 저는 데이터 수백 행을 하루 종일 손으로 복사하며 붙여넣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반복 작업이 결국 저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줄 씨앗이었다는 걸. 회사 생활이 단순히 월급을 받는 과정이 아니라, 조직의 작동 방식을 온몸으로 익히는 훈련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나루배만 만들다가, 어느 날 큰 배를 설계하다
처음 배치받은 부서는 데이터가 쏟아지는 곳이었습니다. 위클리 레포트, 먼슬리 레포트, 각 법인별 매출 데이터를 취합해서 정리하고 보고하는 일이 주 업무였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컨트롤 C, 컨트롤 V만 반복했습니다. 파일이 버벅이는 것도 당연한 줄 알았고, 영업일 중 이틀이 통째로 그 작업에 쓰이는 것도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걸 더 빠르게 할 수 없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블로그도 찾아보고, 선임이 화면을 두드리는 걸 옆에서 훔쳐보기도 했습니다. VLOOKUP(브이룩업)을 처음 배웠을 때, 여기서 VLOOKUP이란 특정 기준값을 기반으로 다른 표에서 원하는 데이터를 자동으로 찾아오는 함수를 의미합니다. 그 함수 하나가 30분짜리 수작업을 3분으로 줄여주던 그 순간의 쾌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다음은 피벗 테이블(Pivot Table)이었습니다. 피벗 테이블이란 수천 행의 원시 데이터를 원하는 기준으로 자동 집계하고 요약해주는 기능으로, 쉽게 말해 방대한 데이터를 한눈에 보이는 표로 바꿔주는 도구입니다. 하루 종일 걸리던 레포트 작성이 오전 중에 끝나는 날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유로 생긴 시간에 저는 다른 걸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데이터가 상위 의사결정자에게 더 잘 읽힐까?"
제가 직접 겪어보니, 엑셀 스킬이라는 건 함수 하나하나를 외우는 저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데이터를 구조화(Structuring)하는 능력, 다시 말해 복잡한 정보를 상대방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재배열하는 사고방식을 키우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때 쌓은 구조화 능력은 이후 어떤 업무를 맡아도 기반이 되었습니다.
엑셀 너머에서 배운 것들, KPI와 카피라이팅
회사에서 얻는 스킬이 엑셀 함수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데, 저는 좀 다르게 봅니다. 제가 실제로 가장 크게 가져온 건 KPI(핵심성과지표) 관리 감각이었습니다. KPI란 조직이나 개인이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측정하는 정량적 지표로, 쉽게 말해 "내가 잘하고 있는지 숫자로 확인하는 기준"입니다.
매년 매출 목표로 쪼이다 보면, 처음엔 그게 스트레스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과정이 셀프 피드백 훈련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조회수가 기대치 이하일 때 "코로나 때문이야"라고 넘기는 대신, "나만 코로나가 아니잖아"라고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자세가 그때 몸에 밴 것입니다. 지금도 개인 프로젝트에서 목표를 설정하고 미달했을 때 원인을 분석하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건, 다 그때의 훈련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카피라이팅(Digital Copywriting)도 비슷하게 쌓았습니다. 디지털 카피라이팅이란 온라인 환경에서 독자의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 최적화된 문구를 작성하는 기술로, 배너 한 줄, 상품 설명 첫 문장 하나가 매출을 바꾸는 세계입니다. 제가 MD로 일할 때 문구 하나를 바꿨더니 데일리 매출이 실제로 달라지는 걸 눈앞에서 봤을 때, 그 무게감은 교과서로는 배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콘텐츠 썸네일을 쓸 때 첫 문장에 공을 들이는 버릇도 그때 생겼습니다.
회사 업무에서 진짜 배울 수 있는 스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데이터 구조화 능력: 복잡한 정보를 의사결정자가 읽기 쉽게 재배열하는 힘
- KPI 설계와 셀프 피드백: 목표를 수치화하고, 미달 원인을 스스로 분석하는 습관
- 문서화와 설득: 페이퍼 워크를 통해 사람을 움직이는 논리 구조를 익히는 과정
- 디지털 카피라이팅: 문구 하나가 결과를 바꾼다는 감각을 데이터로 체득하는 경험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자영업자 수는 약 550만 명에 달합니다. 그 중 상당수가 회사 경험 없이 바로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가 초기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은, 시스템을 먼저 몸에 익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방증합니다.
주니어의 반복 업무가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
신입 때 프린트를 엄청나게 했습니다. 파일을 꽂고, 복사하고, 분류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때는 솔직히 "이게 뭔 의미가 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이 축적된 후에야 알게 됐습니다. 그 순간에 주변이 보고 있는 건 결과물이 아니라 태도라는 걸.
업무를 어떻게 대하는지의 자세를 애티튜드(Attitude)라고 합니다. 여기서 업무 애티튜드란 맡은 일의 크기와 관계없이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일관된 자세를 의미하며, 조직에서 다음 기회를 받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상사들은 그걸 생각보다 훨씬 잘 보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냉정한 얘기지만 사실입니다.
반복 업무 속에서도 자동화를 고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수기 작업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걸 매크로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과, 그냥 하는 사람은 1년 후에 완전히 다른 자리에 있게 됩니다. 고용노동부의 직업능력개발 자료에 따르면, 업무 자동화 역량을 갖춘 직원이 조직 내 성과 평가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비율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카페를 창업할 때도 저는 이 모든 경험이 한꺼번에 작동하는 걸 느꼈습니다. WBS(작업분류체계)를 만들고, 원가 관리표를 짜고, 오픈까지의 태스크를 쪼개는 과정이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와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WBS란 프로젝트 전체 작업을 계층적으로 분류한 관리 도구로, 무슨 일을 언제까지 누가 해야 하는지를 한눈에 정리해주는 틀입니다. 규모만 달랐지, 하는 일은 같았습니다.
주니어 시절에 시스템을 모른 채 그냥 흘려보내는 사람은 나중에 나루배만 계속 만들게 됩니다. 반면 그 경험 속에서 "조직이 어떻게 굴러가는가"를 조금씩 내 것으로 소화한 사람은, 언젠가 큰 배를 설계할 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아무 의미 없어 보여도, 그 태도와 스킬은 조용히 쌓이고 있습니다.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잘하려는 고민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